뉴스 보도

한국 최초의 후기 성도 선교사들 (1)

시간 속으로: 역사와 추억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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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대연 형제 (한국 교회 역사 고문)
삽화: 박희령 자매

코로나가 창궐했던 초기에 이 땅에서 봉사하던 많은 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국으로 돌아갔다. 우리 나라에 외국인 선교사가 배치된 이래로 이처럼 선교사가 대규모로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다. 익숙한 존재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교회의 회원들에게 상실감을 남겼다. 그만큼 우리의 교회 생활은 선교사라는 존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최초라는 타이틀에는 영광이 따르지만, 희생과 어려움도 함께 한다. 한국과 관련된 최초의 선교사들에 대한 역사를 17개의 주제로 나누어 소개하려 한다.

1. 최초의 현지 봉사 전임 선교사 (1956년) - 돈 지 파웰, 리차드 데튼

1955년 8월 2일 화요일에 조셉 필딩 스미스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은 서울의 남산 언저리에서 대한민국을 헌납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초석이 그렇게 세워졌다. 통상적으로 사도가 국가나 지역을 헌납할 때는 선교사를 대동한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은 해외의 민간인이 입국을 하려면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한 제약으로 인해 1955년 7월 초, 스미스 회장이 대한민국의 헌납을 위해 아내를 포함한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미국을 떠날 당시 다른 선교사를 대동하기는 쉽지 않았다.1

파웰 장로 – 한강에서의 침례식© 2024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파웰 장로는 테튼 장로와 함께 최초의 현지 봉사 전임 선교사였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에서 각 와드는 미국 정부와 교회 사이의 협약에 따라 선교사를 한 명씩만 파견할 수 있었는데 파웰 장로는 일본 선교부로 부름을 받았다.파웰 장로가 선교 사업을 시작할 때 그는 기혼 상태였고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파웰 장로의 아내는 친정 부모와 함께 생활하기로 하였다. 결국 이러한 가족 상황과 제일회장단의 권고에 의해 파울 장로는 조기 귀환을 하게 되었다.

파웰 장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1955년 여름, 나는 동반자 게일 이 카 장로와 함께 일본 가나자와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교부 월간 소식지를 받았는데, ‘한국, 선교 사업을 위해 헌납 예정’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였습니다. 카 장로와 저는 서로를 바라보며 거의 동시에 “난 한국에 가고 싶어!”라고 외쳤습니다.

조셉 필딩 스미스 장로와 그분의 아내 제시 이반스 스미스 자매가 우리 선교부에 왔다가 1955년 8월 2일에 한국으로 건너가서 선교 사업을 위해 한국을 헌납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구역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한국에 관한 얘기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로버슨 선교부 회장과 함께 구역 모임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한국이 헌납되었는데, 언제 선교사를 보낼 것인지 여쭈었습니다. 한국 상황이 너무 위험하고 현지 사람들도 그렇고 여건이 마땅치 않아서 선교사를 보내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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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지 파웰, 폴 씨 앤드러스, 데튼 장로 (왼쪽부터)© 2024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1956년 초, 데튼 장로와 저는 순회 장로로 부름을 받아서 모든 선교사 동반자 조를 찾아다니며 필요한 대로 선교사를 돕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선교사를 방문하는 동안 선교부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는데, 로버슨 선교부 회장이 백내장이 발병하여 수술을 위해 귀국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선교부에 도착하니 폴 시 앤드러스 회장이 아내와 가족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앤드러스 회장은 한국으로 가서 김호직 박사와 한국에 주둔하는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  

앤드러스 회장은 데튼 장로와 제게 한국으로 가서 선교 사업을 사직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분은 선교부 회장으로 성별될 때, 한국을 급히 방문해서 가능한 한 빨리 선교 사업을 시작하라는 지침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4월 6일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비자가 제 때 나오지를 않았습니다.”3 

김호직 박사의 노력으로 파웰 장로와 데튼 장로는 비자를 받아 4월 20일에 입국했다. 추가로 선교사 4명이 입국했고, 파웰 장로는 서울에서, 데튼 장로는 부산에서 각각 다른 동반자와 함께 봉사했다.

2. 최초의 한국인 전임 선교사 (1956년) – 이영범, 신호범

이영범장로와 앤드러스회장© 2024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선교사였던 파웰 장로와 데튼 장로는 서울 신문로에 있는 서울고등학교 교실에서 서울 지부를 조직했다. 서울 지부 회장은 파웰 장로였다. 이영범 형제는 1954년 12월 5일에 김호직 박사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이영범 형제는 파웰 장로의 제1보좌로 부름 받았다. 1956년 9월, 앤드러스 북극동 선교부 회장은 평소에 선교사로 봉사하기를 염원하던 이영범 형제를 전임 선교사로 불렀다. 당시 이영범 형제는 연세대학교 3학년이었다.4

“(1956년 9월 1일) 나는 교회의 한국인 최초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낡은 전구 공장을 빌려 모임 장소로 쓰고 2층 다다미 방에서 거처를 하니 밤에는 쥐들이 머리 위를 넘나들었다. 그 때의 생활비는 한달에 20달러였는데 그 돈을 미8군의 군인 회원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다달이 도움을 주었다.”5

이영범 형제는 선교사업이 끝난 후에 미국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이영범 형제는 1970년 9월 모국을 방문하여 삼청지부의 건축기금으로 100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리스에 거주할 때는 삼청지부 자매들이 만든 병풍, 족자 등을 현지 주민들에게 판매하여 삼청지부의 건축기금 모금을 도왔다.6

이영범 형제가 선교사로 부름 받을 무렵 북극동 선교부에는 한국에서 봉사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한국인이 있었다. 바로 신호범(미국 이름: 폴 신) 형제였다. 신호범 형제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선교사로 봉사했으며, 훗날 1988년부터 서울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했다.

비자 문제로 한국 입국이 무산되어 일본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신호범 형제© 2024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나는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극동 선교부로 지원했기에 극동 선교본부가 있는 도쿄에 먼저 가야 하는데, 아직 영주권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만 하와이로 가게 되었다. 

내 한국 여권으로는 한국과 수교가 안 된 일본 입국이 불가능해 미국 여권이 나올 때까지 하와이에 머물게 된 것이다. … 

마침내 3개월 후 교회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은 나는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내리게 됐다. … 

내가 한국에 가고 싶어 극동을 지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선교부장이 나를 불렀다. 

‘한국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렇지만 폴 형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한국에 갔다가는 언제 군대에 끌려가게 될지 모르네. 그렇다고 한국 사람들을 멸시하고 싫어하는 일본에 있자면 고생이 심할 텐데 …’”7 

결국 신호범 형제는 한국으로 가려는 마음을 접고 일본에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3. 최초의 건축(노무) 선교사 (1963년)

성도의 벗, 1966년 10월호 표지© 2024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1950~1960년대 남태평양과 중남미에서 활동했던 건축 선교사들은 참으로 독특한 존재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기보다는 현지에서 교회 건물 건축을 도우며 봉사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충분치 않고 대부분 작고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아, 그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자료는 성도의 벗에 실린 기사가 유일하다.

“1963년 7월 14일 선교부장님을 위시하여 노무 선교사 감독 루수 형제와, 노무 선교사들과 서울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용두동 현장에서 기공식이 거행되어 공사는 착착 진행되어 지금 현재 지붕을 다 올린 정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작년 7월 저희들이 노무 선교사로 임명 받은 후 망치질, 톱질 한 번 제대로 못하여 본 자신들이 교회 건축에 과연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두려움과 암담한 심정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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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이 카 선교부 초대 선교부장 가족 사진 2. 노무 선교사 단체 사진 (1964. 11. 1)© 2024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삽질 몇 번에 손에 물집이 생기고 조금 지나친 일을 하고 나면 코피를 쏟던 신체들이 이제는 강철에 비할만큼 단단하여 지고 웬만한 일이면 자신을 가질만큼 기술도 숙달되었습니다. 고된 일도 이제는 고비를 넘기고 완공의 날이 눈 앞에 보입니다.”8

또 다른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동부지부 예배당은 만 3년 3개월 만에 하나님의 집으로 헌납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이 예배당은 참으로 성도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처음 각 지부에서 부름을 받은 노무 선교사 즉 서부지부에서 윤재철, 김명웅 형제, 동부지부에서 남영진 형제, 대구지부에서 김상호 형제, 김성규 형제, 부산지부에서 김형표 형제 등 전혀 건축에 대한 기초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미국의 건축위원회에서 파견된 캐내스 디 루스 형제님의 지도하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9 

이들은 건축 선교사로 일하며 습득한 기술을 살려 이후 다른 도시의 예배당 건축을 감독하거나 한국 관리본부의 관련 직책에서 근무하며 한국의 교회 건축에 크게 기여하였다.10 

1 1954년 9월, 해롤드 비 리 장로는 육군 준장의 자격으로 방한하여 계속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1955년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도 출발 전에는 육군 소장의 자격으로 왔지만,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민간인 입국이 허용되어 사복을 입고 성역을 펼쳤다.
2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뤄지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선교사가 도착했는데, 언제고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서울에서도 파괴되지 않은 주택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3 Korean Mission Journals, “Don G. Powell – 1956 to 1957”, p. 17
4 “Korean Mission Journals, Young Bum Lee -1956-1958”, p. 31
5 Church Beginnings in Korea 1955-1962 Part One-A
6 “젊음의 회상”, 성도의 벗, 1996년 4월호 지역소식, 4쪽
7 “이 형제 100불 희사”, 성도의 벗, 1970년 10월호, 33쪽
8 “신호범 자전 에세이: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 웅진 지식하우스, 135~137쪽
9 “건축 소식”, 성도의 벗, 1964년 창간호, 22~23쪽
10 “하나님의 집 헌당”, 1966년 10월호, 30쪽
11 성도의 벗, 1966년 10월호는 노무 선교사였던 윤재철 형제가 평생 간직해오다 세상을 떠날 즈음 한국 교회역사위원회에 전달한 것으로 표지 상단에는 “팔머 선교부장 66년 헌당식, 힝크리 장노 12사도 시절 헌당식”이라고 자필로 적혀 있다. 또한 안쪽에는 게일 이 카 회장 한국 선교부 초대 회장의 가족 사진과 노무 선교사의 단체 사진이 테이프로 소중하게 붙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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